전 세계 금융 질서가 디지털 전환을 맞이하면서 통화 패권 경쟁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미국은 디지털 달러(CBDC,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연구를 본격화하며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구사 중이며,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화를 일부 지역에서 상용화하며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원화는 여전히 현금 중심의 통화 시스템에 머물러 있어 디지털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는 상황입니다. 디지털 화폐 시대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금융 주권과 국제 경제 질서를 결정짓는 전략적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자국 통화의 생존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달러와 위안화의 추진 배경과 구조, 그리고 원화가 취해야 할 전략적 방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디지털 달러의 패권 수성 전략
미국은 세계 최대의 기축통화 발행국으로서,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 안보의 핵심 과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화된 결제 시스템과 블록체인 기술의 확산, 민간 암호화폐의 성장 등으로 인해 기존의 금융 시스템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지털 달러 발행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연방준비제도(Fed)는 MIT 미디어랩과 함께 디지털 달러 개발을 위한 ‘Project Hamilton’을 수행했으며,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 금융중개기관과의 관계 재정립을 두고 검토 중입니다. 디지털 달러는 기존 상업은행 계좌 기반 시스템과는 달리,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화폐로, 사용자 간 직접 거래가 가능하며, 실시간 정산, 낮은 결제 수수료, 지급 시스템의 효율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 세계 금융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 입장에서는 도입 속도가 빠르기보다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러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 디지털화가 오히려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안화 등 대안 통화의 부상에 대응하고, 국제 결제 시장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디지털 달러 도입은 결국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 디지털 위안화의 확장 전략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e-CNY)를 통해 디지털 통화 경쟁에서 한발 앞선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 인민은행 주도로 디지털화폐 개발을 시작해, 2020년부터는 선전, 쑤저우 등 주요 도시에서 시범 운영을 거쳤으며,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외국인 방문객 대상 결제 서비스도 제공하였습니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중앙은행이 직접 개인이나 기업에게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형태로, 기존 모바일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 위챗페이와는 달리 통화 발행의 주도권을 완전히 중앙정부가 쥐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는 자금 흐름의 추적, 세원 투명화, 불법 금융 방지 등 다양한 정책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으며, 동시에 국내 통화 주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국경 간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감지됩니다. BRICS 국가 간 무역 정산, 일대일로 참여국과의 협력 강화 등을 통해 디지털 위안화를 국제 결제 수단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주도의 SWIFT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일부 국가들과의 무역을 비달러 기반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달러 중심 국제금융 체계에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원화의 생존 전략과 제도적 과제
한국은 디지털 통화 개발에 있어 비교적 신중한 접근을 해왔지만,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한국은행은 2021년부터 디지털 원화(CBDC) 모의실험을 시작했으며, 2023년까지 2단계 테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실거래 환경에서의 결제 기능, 오프라인 송금, 위조 방지 기술 등의 테스트를 통해 기술적 기반은 상당 부분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원화의 상용화 일정은 아직 미정이며, 민간 결제 시스템이 이미 고도화된 한국 특성상 ‘왜 굳이 디지털 화폐가 필요한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국제 금융질서가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원화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과제가 시급합니다. 첫째, 통화 주권 확보와 지급결제의 효율성 확보를 위한 법적 기반 마련입니다. 둘째, 디지털 원화 도입에 따른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문제 해결입니다. 셋째, 민간 금융기관과의 역할 조율 및 금융중개 기능 재정립입니다. 넷째, 국제 결제 시스템과의 연동 및 환율 안정성 확보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에서는 국제 통화 간 경쟁에서 원화가 고립되지 않도록 디지털 인프라를 통해 ‘선택 가능한 결제 통화’로서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 통화 시대는 단순한 기술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 통화 주권, 금융 패권, 데이터 통제력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전략 경쟁입니다. 미국의 디지털 달러는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려는 방어적 카드이고,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는 공격적 수단이며, 한국의 디지털 원화는 생존과 자율성 확보를 위한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디지털 통화가 가져올 경제·금융 구조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전략과 준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