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는 제조업의 전략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생산거점을 이전하며 비용 경쟁력을 확보해 왔습니다. 그러나 미중 무역분쟁,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 일련의 사건들이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주요국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제조업 기지를 자국 내로 되돌리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제조업도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첨단·전략 산업 중심의 생산기지를 국내로 복귀시키는 전략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생산기지 회귀와 산업 경쟁력 강화
1990년대 이후 한국 제조업은 인건비 절감과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해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 대규모 생산 설비를 구축해 왔습니다. 특히 전자, 자동차, 섬유, 가전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이러한 추세는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임금 격차 축소, 보호무역주의 확산, 원자재 및 물류비 상승 등으로 해외 생산의 장점이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CHIPS Act)’, 유럽의 ‘EU 칩스법’ 등 자국 중심 공급망 정책은 해외 생산품에 대해 차별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IRA는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와 부품만이 보조금 혜택을 받도록 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기업에게 현지 생산 혹은 국내 생산 후 FTA 혜택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리쇼어링은 단순히 ‘국내로 공장 이전’이 아니라, 첨단화된 스마트팩토리, 자동화 설비, 연구개발(R&D)센터와 결합된 복합형 거점 구축을 의미합니다. 단순 조립이나 하청 위주의 생산은 여전히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가 유리하기 때문에, 국내 복귀는 주로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제조 부문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고용 변화와 노동시장 영향
리쇼어링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는 국내 고용 창출입니다. 다만 과거와 달리 대규모 단순 노동직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설비 운영, 공정 설계, 품질 관리, 데이터 분석, 로봇 제어 등 고숙련 직종 중심으로 일자리가 재편됩니다. 이는 제조업 근로자들의 직무 역량과 교육 체계의 대대적인 개편을 요구합니다.
현재 국내 제조업 인력 구조는 고령화가 심각하고, 젊은 세대의 제조업 기피 현상도 뚜렷합니다. 생산기지가 복귀하더라도 이를 운영할 숙련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국내 제조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직업계 고등학교, 전문대, 산업기술대학과 연계한 ‘맞춤형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 필수적입니다.
또한 리쇼어링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인구 유입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 과밀 문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인프라가 잘 갖춰진 수도권만 선호하는 현상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지방 산업단지 인프라를 확충하고, 교통·주거·교육 환경을 개선해 기업 유치를 지원해야 합니다.
정책 지원 체계와 제도적 한계
한국 정부는 ‘유턴기업 지원제도’를 운영하며 세제 감면, 입지 지원, 정책 금융 제공 등을 통해 리쇼어링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 시행 이후 복귀를 결정한 기업 수는 연간 10~20곳 내외로,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주된 이유는 인건비와 토지·전력 비용이 해외에 비해 높고, 인허가 규제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토지 무상 제공, 장기간 세금 감면, 법인세 인하, 전력 보조금 등 공격적인 유치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공장 부지 확보가 어렵고, 전력 요금과 인건비가 높아 기업 입장에서는 복귀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환경 규제, 노동법 등 제도적 장벽도 리쇼어링을 가로막는 요소로 지적됩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인세·소득세 장기 감면 ▲산업단지 임대료 인하 ▲전력·가스 요금 지원 ▲환경·건축 인허가 절차 간소화 ▲첨단 산업 인프라 구축이 병행돼야 합니다. 특히 반도체·배터리 등 국가 전략 산업 분야는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므로, 리쇼어링 기업에 대한 특화된 인센티브가 필요합니다.
지속 가능한 리쇼어링 전략
리쇼어링이 단발성 정책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비전과 실행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을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생산기지로 만드는 종합 전략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중요합니다.
- 안정적 전력 공급과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구축
- 국제 물류망과 항만·공항 인프라 확충
- 연구개발(R&D) 지원과 산학연 협력 강화
- 노동시장 유연성과 숙련 인력 확보
- 정책의 일관성과 법적 안정성 보장
결국 리쇼어링은 국가 안보, 산업 경쟁력, 고용 창출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복합 과제입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국내 제조 기반을 강화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이를 기회로 전환하는 나라는 향후 산업 패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입니다.
한국 제조업의 리쇼어링 전략은 단순한 공장 귀환이 아니라, 산업 전반의 첨단화·고부가가치화와 맞물린 구조적 전환이어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비용·환경·인재라는 세 축을 완성한다면, 리쇼어링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