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한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는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취지로 출발했지만, 사회 전반에 큰 반발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흐름이 이어졌던 만큼, 이번 69시간제 논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한편, 특정 산업군이나 프로젝트 기반 업무에서는 단기 집중 근무가 필요한 경우가 있어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결국 69시간제가 유연한 제도인가, 아니면 무리한 시도인가를 판단하려면 제도의 배경, 실제 노동현장의 현실,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근로 유연성 확대라는 정책 취지
69시간제는 주 단위가 아닌 월 단위 또는 분기 단위로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컨대 한 주에 최대 69시간까지 집중 근무한 뒤, 그만큼의 휴식을 다른 주에 보장받는 방식입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개인의 시간 선택권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IT, 제조업, 건설업 등 특정 산업군에서는 프로젝트 일정이나 수주 시기 등에 따라 집중 근무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 획일적인 주 52시간제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이 제도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탄력적 근로시간제, 재량근로제 등 기존 유연근무제와 함께 도입되어, 노동자와 기업 간 자율적 합의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방향을 취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노동자가 근무 시간을 스스로 설계하고, 장시간 노동 후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는 것이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연성’이 실제로 노동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현실적 문제: 노동권 침해와 과로 리스크
69시간제가 발표되자 가장 먼저 반발한 집단은 청년층과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연성'이라는 명분이 결국 사용자 중심의 노동시간 확대 수단이 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특히 한국은 이미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장시간 노동에 따른 건강 악화, 산업재해, 정신질환 문제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실제로 주 52시간제 시행 전까지 과로사와 심근경색, 뇌졸중 등의 직업병 사례가 빈번했고, 야근·주말근무가 일상화된 노동문화는 ‘워라밸’과는 거리가 먼 현실을 보여줍니다. 노동현장에서 ‘자율적 선택’은 이름뿐인 경우가 많고, 특히 힘의 균형이 불균형한 중소기업이나 하청업체에서는 사용자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장시간 근로를 수용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또한 휴식 보장이 제도적으로 미흡하거나 연장근무 후 대체 휴일 사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실상 법정 초과 근무가 합법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침해된다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제도 보완과 대안적 접근 필요성
69시간제 논란은 단순히 노동시간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노동문화와 제도적 신뢰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노동시간 유연화가 정말 필요한 제도라면, 그에 걸맞는 견고한 보호장치와 노동자 중심의 설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첫째, 초과근무 시 대체휴무나 유급휴가가 강제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감시할 수 있는 감독 시스템도 강화돼야 합니다. 둘째, 연장근무를 원하는 노동자에게만 적용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명확히 하고, 이를 문서화한 근로계약에 반영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셋째, 근무시간 기록의 디지털화와 AI 기반 모니터링 등을 도입해 법정 근무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자동으로 경고·시정 조치를 내리는 기술적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넷째, 청년층과 여성, 돌봄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입장을 반영한 노동시간 정책 설계가 이뤄져야 하며, 산업별 특성과 생애주기별 근무환경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부는 일방적인 입법 추진이 아닌, 노사정 대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신뢰 기반의 노동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기존 제도의 실패 원인을 정확히 분석한 뒤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69시간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신뢰 구조를 시험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유연성이 곧 불안정성을 의미하지 않도록,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건강권 보장이 반드시 전제돼야 합니다. 제도가 유연할수록 원칙은 명확해야 하며, 노동정책은 정책 대상자인 국민과 함께 설계돼야 합니다. 진정한 유연성은 강요가 아닌, 선택일 때 가능한 법입니다.